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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서재/내가쓴글

죽산 조봉암, 法殺(1959.7.31) 50주년

죽산 조봉암 선생 법살 50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거쳐 해방후 공산당과 결별한 뒤 대한민국 정부수림에 참여하여 제헌의원으로서 헌법제정에 기여하고, 대한민국 초대 농림장관, 국회부의장을 거쳐 야당 대통령 후보로 2·3대 대선에 출마했던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 이다.


오늘은 1959년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그들의 최대 정적인 죽산 조봉암을 국가보안법상의 간첩죄의 누명을 씌워 사형을 시킨 것으로서, '법에 의한 살인', '법살' 로 부른다.

그의 죄목은 평화통일을 주장한 것이였다.
그에게 적용된것은 국가보안법의 간첩죄엿다.

지금의 현실에서 볼때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것이 죽어야 할 죄목인가?
시대를 앞서간 인물 "죽산 조봉암"은 앞선 시대를 두려워하는 세력에 의하여 법이란 이름으로 살해 되었다. 
그리고 또한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살아 숨쉬며 또다른 죽산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 시대는 바뀌어도 기득권에 기대어 새로운 앞선 시대를 두려워하는 세력은 온존하고 있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승만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죽산 조봉암 사형시 유언)

"우리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최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건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 하에 피 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진보당 대선강령)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죽산 조봉암은 1898년 9월25일 인천 강화에서 태어나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경성 YMCA 중학부에서 수학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첫 옥고를 치뤘다.

이후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며 사회주의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내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해 문화부책으로 활약한 뒤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가 됐다. 1930년 ML당 활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검거돼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다.

광복 후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1946년 공개서한을 통해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한 뒤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에는 재선에 성공, 제2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됐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 낙선하고 1956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해 23.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같은 해 진보당을 창당했고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간첩 혐의를 받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1심에선 징역 5년이 선고됐지만 1959년 2월 대법원은 사형선로를 내렸고 7월 30일에는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그리고 31일 사형당했다.

2007년 9월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됐음을 인정하고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인용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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