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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⑪ 무장독립투쟁 연구 빈약한 이유 ‘현대사 연구 금기’는 독립운동사 말살 의도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역사학도들에게 현대사는 일종의 금기 영역이었다.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가 만들었다는 이 금기는 표면상 현대사는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는 명분이었다.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 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 교과서의 공식이 단군 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현대사, 객관적 연구 난망” 내세우지만 총독부 주택난 해결 정책은 세밀 묘사 1920년대 참의부 등 일제와 숱한 교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엔 이름만 삐죽 1961년 11월에 있었던 독립운동자동인회 발기 총회 기념식. 맨 앞줄 오른쪽에서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⑩ 정조독살설 진실과 거짓 사관 ‘심환지, 정조 독살 의혹 어의 비호했다’ 기록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건릉이다. 서쪽에 부친 사도세자(장조)와 혜경궁 홍씨의 융릉이 있다. 개혁군주 정조의 급서는 조선을 정상국가로 만들려던 마지막 임금의 죽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이 적지 않다. 여기에는 일정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치구조이다. 이 구조에 주목한 것은 청의 강희제였다. 그는 효종에 이어 서른넷의 현종이 사망하자 “임금의 수명이 길지 못하다”, “신하의 제재를 받아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숙종 12년(1686) 윤4월에는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서 우리 조정(청)의 보호가 없다면 몇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⑨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자운서원. 율곡 이이를 모신 서원으로 제자 김장생도 배향되어 있다. 김장생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창작해 사실인 것처럼 전파했다(왼쪽). 유수원이 쓴 사회 개혁서인 . 유수원은 노론에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임에도 국사 교과서는 노론이란 식으로 서술해왔다(오른쪽)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이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역사관은 일제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다. 일제 가담 노론 출신 일부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8) 식민사관 뺨치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 백제의 왕성이었던 서울 풍납토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서기전 2세기 무렵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한국 쪽 학자들은 서기 3세기 후반에야 축조되었다고 주장했다 ‘풍납토성, BC 2세기 축조’ 탄소 연대 측정도 무시 과학조사 불구 “AD 3세기 축조” 억지 주장 삼국 건국시기 수십~수백년 후퇴시켜 초기기록 허위 확인된 ‘일본서기’ 인용 등, 서천왕·근초고왕·눌지왕부터만 실존 인정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이하 위원회)란 조직이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자 한·일 정상의 합의로 2002년 발족하여 2005년까지 활동했던 조직이다. 물론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었다. 위원회는 2005년 (이하 보고서)를 발간했다. 위원회는 이 를 ‘장래 양국 역사교과서 편..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⑦주몽·온조·박혁거세 삼국시조 아니다? 광개토대왕 비문. 김부식과 이규보는 이 비문의 존재를 몰랐으나 비문에 등장하는 시조 이야기를 자신들의 저서에 실었다. 초기 기록이 창작이나 중국 기록을 보고 베낀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중 후한서에 고구려 대무신왕·모본왕 나옴에도 유령 취급 후한서 ‘모본왕, 중국내륙 침략’ 기록, 태조왕 이전부터 강국이었음을 입증 주류학계는 “태조왕때 사실상 건국” 식민사학따라 온조·혁거세 존재도 불신 현행 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삼국의 건국 시조를 누락시켰다. 대신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 때 사실상 건국되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356~402) 때 건국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이전의 국왕들은 후대의 조작이거나 부락 단위의 지배자에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⑥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나? 6차 교육과정의 구 국사교과서의 부록, ‘역대왕조계보’. 신라는 내물왕(재위 356~502)부터 재위연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신라가 사실상 건국되었다는 의미이다. 무려 400년 이상의 신라사가 부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학계 주류의 정설(定說) 중의 하나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현행 에 삼국의 시조가 누락되어 있는 것도 이런 사관의 반영이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무덤 벽화.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라는 인물의 묵서명이 실려 있다. 이 묵서명이 없었으면 한사군 유물로 둔갑했을 것이다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양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를 간행하면서 낙랑·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전에는 누구나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했었다. 일제뿐만 아니라 북한도 이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남한 주류 사학계는 일제의 발굴 결과는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도 북한의 발굴 결과는 무조건 부인..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④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 중국 삼국시대 유주(왼쪽 점선 안)와 대방군(오른쪽 점선 안) 지도. ‘중국 역사지도집 제3집(삼국, 서진시대)’에 실린 것으로, 위나라가 평안남북도는 물론 황해도의 대방군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원에서 촉, 오와 싸우기에도 전력이 부족하던 위나라가 고구려 남부에 대방군을 운영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사군 중에는 진번·임둔군처럼 설치 25년(서기전 82) 만에 낙랑·현도군에 편입된 군이 있는가 하면 대방군처럼 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다시 설치된 군도 있다. 대방군은 요동의 토호였던 공손강(公孫康)이 3세기 초반에 낙랑군 남부에 세운 것인데, 현재 주류 사학계는 황해도와 한강 이북 지역으로 비정하면서 과거에는 한사군 진번군의 고지(故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를 평남 일대라고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③ 낙랑군은 어디 있었나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2천년전 한서 “베이징 일대에 위치” 후한서 “낙랑=옛 조선, 요동에 있다” 사기 “만리장성 시작되는 곳에 자리” 낙랑군에 있었다는 갈석산.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데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유명한 산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