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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서재/좋은책

‘호란’ 겪던 조선, 지금 한반도 정세 보는 듯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한명기 지음/푸른역사·3만5000원

1637년 1월30일 조선의 왕 인조는 청의 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3번 큰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배례)로써 항복하고 용서를 빌고 나서도, 환궁의 허락을 받기 위해 밭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려야 했다. ‘죽음으로써 문명국의 자존심을 수호하자’고 외치던 신료들은 임금의 옷자락을 잡으면서까지 살려고 배에 오르는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결국 남은 “고통은 대부분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정묘호란과 10년 뒤의 병자호란은 우리 외교사에서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사례로 남아 있다. 호란의 원인으로 흔히 ‘조선의 친명배금’이 거론된다.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의 지은이 한명기 명지대 교수(사학)는 기본적으로 호란의 동인을 청 자체의 필요성에서 찾는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새 정권이 ‘친명배금’을 표방한 것은 사실이나 ‘배금’을 현실에서 실천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정묘·병자호란이 기본적으로 청과 명의 관계 속에서 규정됐다는 것을 강조한다. 1633년 6월 당시 후금은 조선을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향을 사실상 확정했다. 당시 후금은 조선을 언젠가는 정복하되, 명과 몽골을 복속시키기 전까지는 회유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조선 역시 이 전쟁의 참화를 극대화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권의 정통성이 절실했던 인조 정권, 화이론에 입각한 사대 이데올로기, 국제정세의 무지 등이 서로 맞물리며 조선은 두 차례나 호란의 참화를 겪게 된다. 특히 척화론자들은 간언이나 상소를 통해 사자후를 토했으나, 유사시 강화도로 파천한다는 게 방도의 전부였다. 그마나 강화도 피난도 제대로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밀려 들어간 것이 현실이다.

호란의 와중에서 보여준 조선 지배층의 기막힌 대응들은 책의 전반부에 소설처럼 묘사돼 있다. 지은이는 “당시 ‘명분과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총론은 있었으되 ‘무엇으로 어떻게 지킬 것인지?’ 구체적인 각론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책을 넘기다 보면, 당시 조선 지배층은 총론에서부터 틀렸다는 의문을 품게 된다. 국제정세의 엄청난 변화 속에 그들이 지켜야 할 명분과 의리는 이미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됐는데도 그들은 당시는 물론이고 호란이 끝난 뒤 1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걸 깨닫지 못했다.

책은 호란이 근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한반도가 처한 외교 지형의 틀을 만든 사건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전까지 중국과의 사대관계만이 사실상 유일한 외교였던 한반도에 새롭게 작용하는 외부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났고, 한반도는 그 틈새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곧 중국과 일본이라는 거대 세력의 틈바구니에 낀 한반도의 운명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책은 한·중·일을 아우르는 대외관계사의 관점에서 두 호란을 다룬다. 호란의 발원과 전개, 그리고 그것이 동아시아 근대의 질서를 예고한 것임을 보여준다. 임진왜란을 도발해 조선에는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가 된 일본은 두 호란을 계기로 발 빠른 행보를 보인다. 위기에 빠진 조선에 조총과 화약 등 무기를 원조하겠다고 접근하는가 하면 조선의 곤경을 교묘히 활용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끌어내려 했다. 한국전쟁 때도 일본은 전쟁 상황을 2차대전 패전에 따른 곤경의 탈출구로 활용했다.

한반도에 그늘 드리우기 시작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대립 구도는 임진왜란부터 시작해 병자호란 때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호란 당시의 정세가 지금 한반도의 정세와 중첩되어, 마치 현재의 사건처럼 읽힌다.

정의길 기자 Egil@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552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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