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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서재/내가쓴글

6.10 민주항쟁 기념일

오늘은 1987년 6월 공간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난지 22년이 되는 국가기념일 입니다. 그냥 기념식장에서 기념 되는 행사일이 아닌 우리 피부에 와닿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되어버렷습니다.

22년이 지난 2009년 6월 10일  오늘, 다시 민주회복을 외치는 민심의 물결이 전국 방방곡극에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왜 다시 22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어야 하는 것 일까요?

그날은 1987년 6월 10일,  오늘은 2009년 6월 10일
그날의 전두환 자리에, 오늘 이명박이 대신하고,
그날의  민주쟁취를 대신, 오늘 민주회복을 외쳐야 하고,
그날의 최류탄 대신, 오늘 물대포를 맞아야 하고,
그날의 박종철,이한열 학생의 죽음, 대신 오늘 노무현 전대통령 죽음이 있고
그날의 언론자유쟁취요구 대신, 오늘 표현의 자유 보장요구가 있고
그날의 집시법, 보안법드등 악법 개정요구 대신, 오늘 집시법,미디어법등 철회요구가 있습니다.

지금이 1987년인가 2009년인가요?
너무도 붕어빵 같은  이 현실이 지난 수십년간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민주성과가 급속히 22년전으로 후퇴한 우리나라 현실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누가 이렇게 한순간에 망쳐 놓았습니까?  (정답 아는 분은 댓글로..^^)

사람 하나 잘 못 뽑은 죄가 이다지도 크단 말인가요?

우리의 자랑스런 전통, 민주쟁취의 역사를 굳건하게 지켜냅시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언제든지 현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래글과 사진은 6.10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누리집에 소개된 6.10민주항쟁 전개과장에 대한 소개 입니다. 잘 읽어 보고 그날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나눔과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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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 태풍전야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화되어 갈수록 민중의 저항 의지는 그에 비례해서 한층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태를 극적으로 뒤집는 사건이 터졌다.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 끝내 목숨을 앗아가고 만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 당국은 평소 해왔던 대로 사건을 얼버무리려 했다.
경찰 당국은 박종철 군이 심문을 시작한 지 30분 후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발맞추어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검 결과 박군은 수십 군데에 이르는 피멍 자국이 있었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이 사건은 곧장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와 추도미사 및 기도회, 항의농성 등도 잇따랐다.

이같은 민중의 거센 항의 열기에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는 통일민주당 창당을 선언했다.
통일민주당의 창당은 미국의 주도 아래 진행된 보수대연합 시나리오가 파탄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마침내 전두환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는 즉각 거센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각계각층속에서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서명과 농성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이 다투어서 반독재 합류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급속도로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터졌다.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며 박종철 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임을 폭로했던 것이다.
민중은 경악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민중의 분노는 한 점의 불꽃만 당기어진다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기세였다.  이제 민중의 분노만 담아 낼 그릇만 준비하면 되었다.

이러한 여망을 딛고 마침내 5월 27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묶어 세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했다. 민중들은 국민운동본부를 통해 범민주세력이 하나로 단결되었음을 보았다.


항장의 시작 - 6월항쟁


6월 10일 아침,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같은 육사 11기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손을 마주 잡고 치켜올림으로써 권력승계 절차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잠실 체육관은 분노한 민중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다.
같은 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는 24만여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1만 8천5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6월항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날 서울에서만도 30여 군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초조해진 경찰은 해가 지자 더욱 포악해져 무차별 폭행을 가하면서 전국에 걸쳐 3천8백여 명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러던 중 서울 도심의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밀려갔다.
밤 10시가 되자 8백 명으로 불어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맹렬한 투석전을 벌여 경찰을 밀어내고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  이것이 전국을 휩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시작이었다.

민중의 투쟁 열기는 갈수록 높아져 6월 18일 전국 16개 도시에서 항쟁 기간중 최대 인파인 1백50만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8만 6천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투쟁의 파고는 높아지고 경찰력은 한계가 드러냄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일각에서는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급속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분노한 민중은 정권의 군투입 위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이 투입되면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민중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군투입 위협에 맞서 가장 과감하게 투쟁했던 것은 부마항쟁의 주역이었던 부산시민이었다.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린 6월 18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그 규모와 치열함에서 부산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부산시민들은 자신들이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확신으로 이번 기회에 아예 정권을 갈아 치우자는 의지를 갖고 적극적인 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이다.
부산에서의 대대적인 항쟁은 전국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으며 그 중에서도 광주시민에게 준 영향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민중은 광주민중항쟁의 세례를 받은 뒤 새롭게 투쟁의 현장에 나선 상태였다.
광주민중항쟁의 불씨가 전국에 퍼져 나가 마침내 수많은 불기둥을 만들어낸 순간이 바로 1987년 6월항쟁이었던 것이다.   이제 광주는 더 이상 외로운 도시가 아니었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국민평화대행진'에서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미 6월 20일부터 백악관에 한국대책 특별반을 편성하여 운영하는 등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미국은 더욱 공개적으로 한국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항쟁기간 동안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6월 26일의 투쟁이 벌어지자 더 이상 지체할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결국 6월 29일 한국의 텔레비전에는 노태우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 자리에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의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이 민중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거듭되는 군투입 위협에 맞서 항쟁을 계속했고, 그 결과 군투입 기도를 파탄시켜 내면서 끝내 항복선언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총칼의 위협 앞에 맥없이 굴복해야 했던 굴종의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마감한 것에 대한 벅찬 환희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6월항쟁은 기나긴 압제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매듭 하나를 푼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민중의 마음가짐은 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규모 행사를 통해서 뚜렷이 표현되었다.
6월 9일 직격탄에 맞아 여러 날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치러진 7월 9일 광장에는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군 장례식은 항쟁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자리였다.

7~9월 노동자 대투쟁 - 깨어나는 사람들

6월항쟁은 결코 6·29선언으로 종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투쟁의 파고를 준비하는 격렬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6·29선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라는 중대한 승부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부터다'라고 외치며 박차고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나라 경제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6월항쟁을 통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권력이 거대한 민중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자신의 힘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이 선진 노동자들로 하여 그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적극 주도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거리에서 타오른 6월항쟁의 불길이 노동현장으로 옮겨 붙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6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1987년 7월 3일, 우리나라 최대의 중공업 도시 울산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현대엔진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다.
현대엔진노조의 결성은 즉각적으로 울산 전역을 노동자 투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였다.
일단 치솟은 투쟁의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부산, 거제, 마산, 창원으로 번져 갔고, 이윽고 서울, 인천, 부천, 구로, 안양, 군포, 성남 등 수도권으로 옮겨 붙기에 이르렀다.
또한 업종별로도 제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운수업, 광업, 사무·판매·서비스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동안 새롭게 결성된 노동조합은 자그만치 1,060개.
이는 지난 1980∼86년 동안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수치였다.
아울러 대투쟁 기간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3,458건으로 하루 평균 40여건 씩 터져 나온 셈이었다.
이는 1986년 하루 평균 0.76건에 비해 무려 50배나 증가한 것이며, 1980년 봄의 노동자투쟁(총 407건)보다 8배나 증가한 것이었다.  가히 봇물 터지는 듯한 기세였다고 할 수 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억압 질서를 뒤흔들어 놓으면서, 끝내는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는 비로소 강력한 엔진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세상을 뒤흔든 100일'이었다. 

6.10민주항쟁 누리집


 
6월항쟁 기념 ‘6·10 범국민대회’
야5당·4대종단·시민단체 참여…‘기념식 의미’ 넘어
서울·부산 등 전국 20곳에서 동시 다발 대회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