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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서재/독립운동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 특집기획

* 경술국치 100돌이 됐다. 한겨레신뭉에서  연중기획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을 연재한다. 3부로 구성된 기획 중 1부에선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 다섯 사람의 견해를 듣는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이야기에서 한국과 일본 역사의 무엇이 뒤틀렸는지,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 화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한겨레




총독부 출신들 “조선에 대해 좋은 일 했다” 자부심 가져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일 식민자료 연구 개척자 미야타 인터뷰


“조선 침략 진행될수록 천황의 인기 치솟아”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② 야마다 쇼지


만주 독립투쟁 다루다 중앙정보부 끌려가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해방뒤 20여년간 방치된 독립운동 사료 27권으로 묶어 펴내
③ 조동걸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독립운동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전무하던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의 기틀을 닦고 후학들을 길러낸 대표적인 1세대 연구자로 꼽힌다.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사 연구에 뛰어들게 된 것은 1969년 4월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위원장 노산 이은상)의 <독립운동사> 편찬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해방 이전 만주군 활동 경력과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친일파’라는 비판에 허덕이던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 중 일부를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에 할당했고, 68년 7월 이 기금의 일부를 토대로 편찬위를 구성했다.
<독립운동사>(사진)는 해방 이후 20여년 동안 방치됐던 독립운동 관련 사료와 증언을 10년 동안 본편 10권과 자료집 17권으로 묶어 펴낸 대작이다. 조 명예교수의 제자인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이전에도 독립운동과 관련한 개별적인 연구는 있었지만 <독립운동사>에 이르러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가 통사적으로 집대성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 수집된 방대한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후학들의 연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소장학자이던 조 명예교수는 ‘상임 조사·집필위원’이라는 직함을 달고 편찬위의 막내로 10년 동안의 편찬작업을 함께했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의 흐름을 의병항쟁(1권), 3·1운동(2·3권), 임시정부(4권), 독립군전투(5·6권), 의열투쟁(7권), 문화투쟁(8권), 학생독립운동(9권), 대중투쟁(10권) 등으로 구분해 정리했다. 자료집에서는 본편에서 인용한 자료들을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도록 한글로 꼼꼼이 번역해 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강원도 춘천교대 교원으로 무명이었던 그가 편찬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역사 현장을 발로 누빈 실증적 연구작업이 중앙 학계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8년에 발표한 ‘안중근 의사 재판기록상의 인물-김두성고(考)’ 에서 연해주에서 실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유해동 옹을 발굴해 ‘안중근 의사의 공판 기록에 등장하는 김두성은 의병장 유인석’ 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1970년 <사학학보>에 발표한 논문 ‘삼일운동의 지방사적 성격-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에서는 강원도 지역에서 진행된 3·1운동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서울지역에 국한돼 논의돼던 3·1운동의 민족사적 의미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제자들은 출신 학교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사 전 분야에 흩어져 있다. 의병장 신돌석을 연구한 김희곤(안동대), 광복군을 연구한 한시준(단국대), 조선의용군을 연구한 염인호(서울시립대) 등 독립운동사 2세대 연구자들이 망라돼 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국사학)는 “조 선생님 또래에서는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학자가 없어 80년대 서울에서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려는 대학원생들은 무조건 조 선생님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10년 넘게 한 교실에 여러 학교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공동 강의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은퇴한 뒤 평생 모아 온 1만여권의 독립운동 관련 장서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그를 두고 “대단한 실증주의자이면서도 단재 사학 정신을 이어 받은 민족사학자”라고 평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간토대지진때 군대자료에 ‘일 정부 학살관여’ 증거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④ 강덕상 


도쿄전범재판때 ‘식민지배’는 거론도 안해
일본에 ‘조선문제 청산’ 왜곡된 시각 심어줘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⑤ 우쓰미 아이코

한-일 근현대사 대안적 공부모임 ‘카자’ 한류에 더해 광주학살·남북이산도 관심

2003년은 한-일 문화교류에서 신기원을 연 해였다. 배용준·최지우가 주연한 <겨울연가>가 ‘후유소나타’로 개명돼 티브이(TV) 전파를 탔다. 일본의 중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심 대상이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영화·가요 등 대중문화 전반으로 확산돼 갔다. 한류 붐이 일고 한국을 찾는 일본 관광객도 급증했다. 일본 정치인의 잇단 망언이나 독도 문제로 인한 한-일 간의 감정 대립, 나아가 남북한의 무력충돌 위험도 일본 여성들의 한국행을 막지 못했다. 이 폭발적 에너지를 두 나라의 역사적 화해 조성에 돌릴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 그렇다면 오만하고 무지한 정치인들이 뒤엉키게 만든 문제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 텐데….

아직은 꿈같은 얘기일 수 있으나 그것을 앞장서서 실험하는 모임이 있다. 이름은 영어 약자 ‘KAJA’(카자)를 쓴다. 일본 이름은 따로 없고 굳이 번역하자면 ‘대안적 한-일 공부모임’이 된다. 우리말로 관심 있는 곳이면 가자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한류에 몰입된 일본 여성이 한 해에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비디오테이프나 디브이디(DVD)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른다. 카자의 회원들은 ‘한류 중독증’에 빠졌다는 공통점 외에 플러스 알파를 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두 나라 사이에 얽힌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정이 예사롭지 않다. 역사의 현장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평화기행을 기획해서 광주 망월동, 평택 대추리, 화성 매향리, 지리산을 찾아갔다. 분단과 한민족의 이산을 체험하려고 개성, 금강산은 물론이고 중국 옌볜(연변)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여는 이 모임의 존재를 처음 들었을 때 주객이 뒤바뀐 것 같아서 취재를 망설였다. 집에서 티브이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처지여서 밑천이 달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9일 도쿄 신주쿠의 커피집에서 카자 집행부의 세 사람을 만나 모임의 ‘정체’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이들의 모임에서 <모래시계> <대장금> <화려한 휴가> <5공화국> <서울 1945> 등은 꼭 봐야 할 작품이었다. 기자가 게으름 탓으로 보지 못했던 <외박> 같은 다큐물 이름도 차례로 나왔다. 할인점 홈에버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여성들의 투쟁을 담은 <외박>을 보고 한국의 민중가요에 반해 배우러 다니는 회원도 있다고 한다.

모임의 회장 쓰루 사와코는 놀랍게도 여든의 고령이었다. 지바현 우라야스에서 시의원을 오래 하면서 반전·반핵 결의를 주도했고 일본의 대표적 군축 평화연구소인 ‘피스데포’의 이사로도 재직했다. 1930년생으로 만철(남만주철도)에 근무하던 부친을 따라 세 살에 만주로 갔다가 패전 후 46년 본국에 돌아왔다. 소녀 시절 잘못된 정책, 정치인의 오판이 얼마나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지를 절감한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아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드라마 등을 녹화해 인도네시아에서 공정무역 일에 종사하고 있는 딸에게도 보내주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회장은 최연장자가 추대된 것일 뿐 노인들의 모임은 아니다. 2007년 말 규약을 만들어 정식 출범한 카자 회원은 현재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연령대는 50대가 많고 성별로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직업은 봉급생활자, 단체 직원, 주부, 출판편집자, 연구자 등으로 다양하다. 코몬즈라는 출판사를 하는 오에 다카코는 ‘인생의 폭이 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모임의 유래는 시민단체 파르크가 4년 전에 연 연속강좌 ‘또 하나의 한류-영상으로 한국 현대사를 본다’였다. 강좌를 들은 이들이 ‘일반 한류’가 아니라 ‘진정한 한류’를 보자는 취지로 자연스럽게 모였다고 한다. 생협운동의 활동가였던 나카가와 미도리는 모임의 의의에 대해 “이제까지 일본인이 한국을 이해하는 기회는 아주 한정돼 있었다”며 “자이니치 차별 문제 등에 제대로 맞서지 못해 항상 미안한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는 ‘고맙다.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을 강하게 느꼈다”고 밝혔다. 오에는 80년 ‘광주 학살’에 대해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고 열심히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카자는 변화의 축일까, 돌연변이일까.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역사드라마를 권하곤 하는 나카가와는 “강력한 흐름이 되지는 않지만 서서히 배어나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