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창간 21주년 맞아 생각해 볼만한 시리즈 물을 기획했군요.
저로서는 공감이 가는 주제이고 어젠다라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같이 보고자 저의 브로그를 통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재진행형 역사 왜곡 뒤엔 ‘쓰다·이병도 짙은 그림자’
"우리 시대의 ‘문제적 역사학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주류 역사학계에 도발적인 도전장을 던진다.
이 소장은 현재 역사학계의 주류 사관이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학계에서 정설이나 통설로 굳어져 있는 기존 이론체계를 뒤집어엎겠다고 한다. 한겨레는 앞으로 10여차례에 걸쳐 수요일치 지면에 이 소장의 글을 실을 예정이다.
한겨레가 이 소장의 주장을 수긍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장의 발언이 불씨가 돼, 우리 역사의 진실에 대한 논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역사 교과서를 덮으면서 잊혀진 독자들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끄집어내, 역사가 우리 현실에 살아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소장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언제든 환영하며, 지면을 내는 데 아끼지 않을 예정이다."
쓰다 소우키치 식민사관, 냉전시대 거치며 정설로, 노론사관 더해 역사 조작, 항일 무장투쟁사 말살
학문권력 역사해석권 독점…동아시아 평화 막아
(쓰다 소우키치 : 만주철도주식회사와 조선사편수회 출신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의 식민사학 이론을 만들어낸 인물)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유사시 군사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그 핵심 논거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있었고 나머지 삼군이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고대 중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다. 이런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 고구려연구재단과 그를 계승한 동북아역사재단이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의 현행 누리집은 ‘올바른 역사’라는 항목에서 “기원전 3~2세기 준왕 대의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평양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고…”라고 쓰고 있다. 고조선의 왕성인 평양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중국 동북공정의 내용과 일치한다. 고구려연구재단도 한때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이라고 표시한 역사 지도를 올렸다가 네티즌들의 항의를 받고 내린 적이 있었다. 동북공정에 대응하라고 설치한 국가 연구기관들이 오히려 동북공정 논리에 동조하는 이상 현상이 진행중인 것이다.
‘낙랑군=평양 지역설’이 일제 때 경성이 현재의 서울이었던 것처럼 확고부동한 사실이라면 모른다. 그럴 경우 우리는 ‘과거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수세적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63년에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에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남한에서도 문정창 선생이 1969년에 간행한 <고조선사연구>를 통해, 그리고 윤내현 교수도 <한국고대사신론>(1986)을 통해, 필자 등도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2006) 등의 저서를 통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그럼에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연구기관들은 동북공정에 맞서는 이런 이론을 완전히 묵살한 채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이 고구려 문제에 대해서는 목청을 높이면서도 고조선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는 속내도 여기에 있다. 이는 현재의 사학계 주류의 지형에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동북공정 외려 동조하는 국가연구기관
한국은 대학 내의 강단사학자들과 대학 바깥의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역사인식을 두고 집단적 갈등을 겪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자들을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비판해왔다. 이들의 주장에 무리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사학계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을 하지 않아 이런 비판을 자초했다. 비판은커녕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논리가 그대로 한국사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재야사학자들은 일제 식민사학의 정점에 국사학계의 태두(泰斗) 이병도 박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식민사학의 교주는 이병도 박사가 아니다.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의 와세다대 유학 시절 스승이자 만철(滿鐵)과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이병도의 이론은 쓰다 등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했거나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에 불과하다. 쓰다의 한국 고대사관은 간단하다. 남만주철도회사의 위촉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 등의 저서에서 쓰다는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모두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쓰다는 이런 주장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를 사실로 전제하고 다음의 논리를 전개하는 비학문적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한반도 북부의 막강한 한사군이 왜 78개 소국으로 우글거리는, 비옥한 삼남지역으로 진출하지 않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야 임나일본부가 성립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삼국사기>가 한강 이남에 일찍부터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임나일본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쓰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창안해냈다. 혼자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창하면서도 “<삼국사기> 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대하여, 1919)고 마치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강변했다. 나중에 이병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쓰다의 <삼국사기> 불신론은 약간의 수정을 가해 받아들였고 그 제자들에 의해 현재 정설(定說)이 되었다.
필자는 이병도 박사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병도가 쓰다의 고대사 인식체계에 가문 당색(黨色)이었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를 제자들이 한국사의 주류 학설이자 정설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조선사편수회 전력 때문에 해방 공간에서 진단학회의 제명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이병도는 냉전체제가 수립되면서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정인보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되면서 한국 역사학계의 태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방 후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한국사 인식체계를 수립하는 것은 좌우를 넘는 시대적 과제였으나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이른바 실증사학이란 미명 아래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의 기본은 그대로 둔 채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역사학계의 정설로 만들었다.
다른 이론 제기하면 재야사학자로 몰아
여기에 노론사관을 가미해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내고, 서인(노론)이 남인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것을 소인이 쫓겨나고 군자가 진출했다는 뜻의 대출척(大黜陟)으로 표현하고, ‘영·정조 시대’란 명칭으로 노론과 대립했던 정조를 영조의 부속 인물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기상천외한 논리로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말살시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인식체계를 하나뿐인 정설(定說)로 만든 데 있다. 사실 일본인들 밑에서 역사를 연구한 이병도의 인식체계는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후학들은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식민사관과 이병도 사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계승할 것과 단절할 것을 구분해야 했음에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정설로 만들었다. 모든 이론은 상대적 진실에 불과하다는 점을 외면한 채 이를 종교적 도그마처럼 만들었다.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는 재야에 있든 강단에 있든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이론의 전체 논리 중 한두 가지 문제를 확대해 전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학문권력을 구축하고 역사해석권을 독점했다. 필자는 21세기 세계화시대를 사는 우리 2세들이 더 이상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점철된 역사관으로 교육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일제 식민사관은 현재 동북아의 화해와 평화 체제 구축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식민사관에 대한 동아시아의 진정한 반성이 화해와 평화 체제 구축의 토대가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둔 본 연재는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①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②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타당한가? ③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④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물론 모든 주제에 대한 반론을 환영한다.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조선 왕 독살사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등이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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