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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서재/역사

봉인도 안된 을사조약 문서…‘불법 국권탈취’ 확인 봉인도 안된 을사조약 문서…‘불법 국권탈취’ 확인 [일제 강점 100년] 4개 조약 원본 검증 결과 위임→체결→비준거친 외교기록 없고, 원본 첫칸이 빈칸, 조약 공식이름 빠져 역사학계 “국권 강탈조약 위법성 방증” 한겨레 2009-12-31 때는 1905년 늦가을이었다.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8일 대한제국 정부에 을사조약을 강제하기 위해 부산을 통해 입국했다. 9일 밤 특별열차 편으로 경성에 도착한 이토는 손탁호텔(지금의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터)에 여장을 풀었다. 이토는 이튿날인 10일 낮 12시30분 걸어서 5분 거리의 경운궁(덕수궁)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으로 찾아가 고종 황제를 알현한 뒤 “(을사조약은) 일본 정부의 확정된 의결사항이므로 결단코 변경할 수 없다. 거부.. 더보기
간도관련 영토취득시효설을 타파해야 1909년 대한제국을을 배제하고 청일간의 불법적인 간도협약을 체결한지 9월 4일이면 100주년이 된다, 100년 동안 실효적으로 지배하면서 문제제기가 없으면 영토를 시효취득한다는 논리들이 널리 펴져있다. 즉, "1909년 간도협약 이후 100년안에 간도반환을 시도하지않으면 영원히 중국의 땅이 된다."라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국제법상 영토에 관해 100년간 점유하면 그나라 땅이 된다는 논리는 일반적인 정설이 아니라고 한다..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 소개한다. [글로벌포커스―강효백] 간도와 이어도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 지난 5일 마자오쉬 중국 외교부대변인의 정례브리핑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외교부 안에 국경분쟁과 지도·지명·공동개발과 관련한 해양.. 더보기
“淸ㆍ日 간도협약 무효” 국회의원들도 나섰다 - 기사 “淸ㆍ日 간도협약 무효” 국회의원들도 나섰다 9월 넘기면 中 실효지배, 누리꾼 서명운동 열기속, 의원 40명도 입법 추진, 국제적 이슈화 주목 오는 9월 4일은 지난 1909년 ‘간도(間島)협약’이 맺어진 지 꼭 100년이 되는 날. 특정 지역을 100년간 실효 지배할 경우 자국 영토로 인식하는 국제법 관례상 간도가 중국령으로 편입된 100년째 되는 날, 영원히 ‘우리 땅’을 잃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거세다. 이에 국회가 움직였다.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은 13일 “9월 4일이 되기 전까지 ‘청일 간도협약 무효안’을 제출할 예정”이라며 “현재 여야 의원 4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으며, 뜻을 더 모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의원은 “안은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와 관련해 적절한 대응..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⑪ 무장독립투쟁 연구 빈약한 이유 ‘현대사 연구 금기’는 독립운동사 말살 의도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역사학도들에게 현대사는 일종의 금기 영역이었다.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가 만들었다는 이 금기는 표면상 현대사는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는 명분이었다.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 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 교과서의 공식이 단군 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현대사, 객관적 연구 난망” 내세우지만 총독부 주택난 해결 정책은 세밀 묘사 1920년대 참의부 등 일제와 숱한 교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엔 이름만 삐죽 1961년 11월에 있었던 독립운동자동인회 발기 총회 기념식. 맨 앞줄 오른쪽에서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⑩ 정조독살설 진실과 거짓 사관 ‘심환지, 정조 독살 의혹 어의 비호했다’ 기록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건릉이다. 서쪽에 부친 사도세자(장조)와 혜경궁 홍씨의 융릉이 있다. 개혁군주 정조의 급서는 조선을 정상국가로 만들려던 마지막 임금의 죽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이 적지 않다. 여기에는 일정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치구조이다. 이 구조에 주목한 것은 청의 강희제였다. 그는 효종에 이어 서른넷의 현종이 사망하자 “임금의 수명이 길지 못하다”, “신하의 제재를 받아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숙종 12년(1686) 윤4월에는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서 우리 조정(청)의 보호가 없다면 몇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⑨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자운서원. 율곡 이이를 모신 서원으로 제자 김장생도 배향되어 있다. 김장생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창작해 사실인 것처럼 전파했다(왼쪽). 유수원이 쓴 사회 개혁서인 . 유수원은 노론에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임에도 국사 교과서는 노론이란 식으로 서술해왔다(오른쪽)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이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역사관은 일제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다. 일제 가담 노론 출신 일부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8) 식민사관 뺨치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 백제의 왕성이었던 서울 풍납토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서기전 2세기 무렵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한국 쪽 학자들은 서기 3세기 후반에야 축조되었다고 주장했다 ‘풍납토성, BC 2세기 축조’ 탄소 연대 측정도 무시 과학조사 불구 “AD 3세기 축조” 억지 주장 삼국 건국시기 수십~수백년 후퇴시켜 초기기록 허위 확인된 ‘일본서기’ 인용 등, 서천왕·근초고왕·눌지왕부터만 실존 인정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이하 위원회)란 조직이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자 한·일 정상의 합의로 2002년 발족하여 2005년까지 활동했던 조직이다. 물론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었다. 위원회는 2005년 (이하 보고서)를 발간했다. 위원회는 이 를 ‘장래 양국 역사교과서 편..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⑦주몽·온조·박혁거세 삼국시조 아니다? 광개토대왕 비문. 김부식과 이규보는 이 비문의 존재를 몰랐으나 비문에 등장하는 시조 이야기를 자신들의 저서에 실었다. 초기 기록이 창작이나 중국 기록을 보고 베낀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중 후한서에 고구려 대무신왕·모본왕 나옴에도 유령 취급 후한서 ‘모본왕, 중국내륙 침략’ 기록, 태조왕 이전부터 강국이었음을 입증 주류학계는 “태조왕때 사실상 건국” 식민사학따라 온조·혁거세 존재도 불신 현행 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삼국의 건국 시조를 누락시켰다. 대신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 때 사실상 건국되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356~402) 때 건국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이전의 국왕들은 후대의 조작이거나 부락 단위의 지배자에 ..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⑥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나? 6차 교육과정의 구 국사교과서의 부록, ‘역대왕조계보’. 신라는 내물왕(재위 356~502)부터 재위연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신라가 사실상 건국되었다는 의미이다. 무려 400년 이상의 신라사가 부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학계 주류의 정설(定說) 중의 하나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현행 에 삼국의 시조가 누락되어 있는 것도 이런 사관의 반영이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 더보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무덤 벽화.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라는 인물의 묵서명이 실려 있다. 이 묵서명이 없었으면 한사군 유물로 둔갑했을 것이다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양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를 간행하면서 낙랑·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전에는 누구나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했었다. 일제뿐만 아니라 북한도 이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남한 주류 사학계는 일제의 발굴 결과는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도 북한의 발굴 결과는 무조건 부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