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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서재

[이정전 칼럼] 신뢰, 사회적 자본, 그리고 가정

신뢰와 정치

4.29 재보선 이후 불거진 한나라당 내 계파 갈등을 무마하기 위해 친이명박 쪽의 '김무성 원내대표' 제안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두 차례나 매몰차게 거절하자, 한나라당 중진인 중도파 K의원은 "큰 정치인인 박 전 대표가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일단은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는 한 집안 식구들에게도 무척이나 신뢰를 잃은 모양이다.

요즈음 어디를 가나 녹색성장 얘기다. 언론매체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녹색성장에 대한 기사를 내고 있다. 심지어 고등학교 정문에도 녹색성장 구호가 걸려 있다. 사실,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것도 아닌데, 정부 각 부처마다 공무원들이 녹색성장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느라고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민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 못한 것 같다. 정부가 정말 녹색성장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 것이 아니라 우선 차분하고 진실한 설득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어느 학자는 말한다.

녹색성장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4대강 정비사업에 대하여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하는 데에는 정부에 대한 불신도 상당히 작용하고 있다. 이 사업이 한반도대운하사업과 관계없다고 정부 관계자들이 틈만 나면 강조하지만, 이들의 말을 정말 믿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이 직접 확실하게 한 마디만 해도 불신이 꺼질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니 불신이 더 커지고 있다.

신뢰의 정치적 중요성을 역설할 때 자주 인용되는 고사는 중국 춘주전국시대의 명재상이었던 관중(管仲)의 얘기다.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던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재미나는 일화가 가장 많았던 시절이다. 관중은 당시 2등 국가였던 제(齊)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든 1등 공신으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꼽힌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도 널리 알려진 관중은 신뢰를 정치의 으뜸으로 삼았다. 관중이 얼마나 신뢰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제나라가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서 노나라 땅의 일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회담장소에서 노나라 장군 한 사람이 갑자기 제나라 왕(제환공)에게 달려들어 목에 비수를 들이대며 노나라 땅을 포기할 것을 공식 선언하라고 협박하였다. 겁에 질린 제환공이 포기선언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장수는 얼른 제 자리로 돌아가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었다. 뒤늦게 화가 난 제환공은 방금 전의 선언이 무효임을 주장하려 했으나 관중이 나서서 말렸다. 아무리 협박에 의한 것이라도 군주가 한 번 선언한 약속을 어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간곡하게 간하였다. 영특한 제환공도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관중의 권고에 따랐다.

제나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중의 정치 덕분에 춘추시대에 가장 번성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들도 제나라 정부의 말이라면 굳게 믿고 따라주었다. 그래서 제환공은 춘추시대에 천하를 호령하는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 그런 제환공도 관중을 특별히 예우했다. 아무리 왕이지만 관중과 면담하고 싶을 때면 직접 찾아갔지 사람을 시켜 부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신뢰와 사회적 자본

신뢰는 경제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부터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여왔고, 녹색산업과 녹색기술을 경제성장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성장의 원동력은 정부에 대한 신뢰, 그리고 국민들 사이의 신뢰다.

우리는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엄청난 불편과 비용을 치른다. 예를 들어서 슈퍼마켓에서 누가 보든 보지 말든 모든 사람들이 제 각기 정확하게 물건 값을 내고 나간다고 하면, 경비원이나 돈 받는 사람이 필요 없어지게 되니 가격도 2,30% 더 싸진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상황이기는 하다. 그러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경비원이나 돈 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고 그 만큼 상품의 값도 비싸지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 사이의 높은 신뢰는 경제활동의 비용을 줄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게 한다.

노사분규가 생산의 차질을 가져와 해마다 막대한 국민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데, 대부분의 노사분규가 노사 간의 불신 때문에 발생하거나 증폭된다. 만일 노사 모두 상대방을 배려하고 신뢰한다면 아마도 노사분규는 상당히 줄어들었거나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이것만으로도 국민경제에 엄청난 이익이 발생한다.

신뢰는 상거래를 활성화하고 생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세금도 크게 절감시켜 준다. 국민들의 외식이 늘어나고 가공식품이 늘어남에 따라 불량식품이 국민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식품업자들이 믿을 수 있게 행동한다면, 불량식품 문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건강이나 안전에 관계된 각종 규제기관을 만들어야 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해야 한다. 각종 불공정행위나 사기 및 기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각종 감독·감시제도, 각종 보증제도, 판·검사제도, 기록보관소, 공증제도, 등 그 수많은 공공기관들의 유지에 소요되는 막대한 국민의 세금은 결국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이다. 국민들 사이의 신뢰가 강하면 이런 제도들의 필요성은 크게 감소하고 따라서 그런 제도의 유지에 소모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도 크게 줄어든다.

신뢰의 경제적 가치가 구체적으로 밝혀지면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를 쓰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신뢰(Trust)>라는 저서에서 후쿠야마 교수(존스홉킨스대)는 사람들이 어떤 공동목적을 위하여 조직이나 집단을 구성하고 상호이해와 신뢰아래 서로 협력하는 능력을 사회적 자본이라고 정의하였다. 퍼트남 교수(하버드대)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자발적 연대나 결사(結社) 내지는 사회적 연결망을 사회적 자본으로 정의하면서 이 연결망의 핵심으로 신뢰를 꼽았다.

확실히 신뢰는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 협동을 일구어내는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자본을 단순히 신뢰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뢰가 사회 전체에 유익한 자본이 되는 상황이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리로 똘똘 뭉친 범죄 집단은 여러 가지 사회악을 초래한다. 사회적 자본을 단순히 사회적 연결망으로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반사회적 단체도 자발적인 사회적 연결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자본은 단순한 신뢰나 신의 그 이상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어느 정도 도덕적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물론 도덕심이 없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끼리도 자발적 협동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점을 늘 강조한다. 그러나 도덕심을 결여한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 협동은 아주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 분야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이다. 예를 들면, 협동에 필요한 사람의 수가 아주 적어야 하고 이들 각각이 먼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의 수가 조금 많거나 근시안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의 협동은 매우 어렵다. 사람의 수가 많을 경우 협동에 필요한 조건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 내지는 이타심을 바탕으로 하는 신뢰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이타심을 바탕으로 한 신뢰다.

불량아의 정리(Rotten Kid Theorem)와 합리적 이타심
 
▲ 사회지도층의 이타적 행동을 그 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런 이타심은 어디에서 함양되는가? 많은 학자들이 가정을 지목한다. 그 동안 후쿠야마 교수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가정과 사회적 자본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고 설명하여 왔다. 그러나 경제학의 관점에서 그 관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한 학자는 아마도 시카고대학교의 베커(G. Becker)교수가 처음일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 이타심에 대한 그의 경제학 이론은 가정과 사회적 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는 이타심을 가지고 가족 모두의 복지를 늘 염두에 두면서 헌신적으로 가정을 꾸려나간다. 원래 가정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마치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즉, 가격기구)이 거래당사자들 사이의 상충된 이해관계를 적절히 교통정리 하듯이 가정에서는 부모의 사랑 어린 보살핌이 가족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적절히 교통 정리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족 구성원 그 어느 누구도 이기적으로 행동해봐야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서 형이 제 욕심만 생각하고 동생한테 1만 원을 뺏어갔다고 하자. 그러면 부모는 동생의 용돈을 만원 올려주는 대신 형의 용돈을 1만 원 삭감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형은 얻는 것이 없다. 따라서 형은 이기적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가족구성원 모두가 그럴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동생이 불량배들에게 용돈을 뺏겨서 울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보고 측은하게 생각한 형이 동생을 도와주기 위해서 동생에게 2만 원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부모는 그 형이 기특해서 용돈을 2만 원 이상 올려줄 것이다. 결국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익이다. 형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 모두가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정이란 보통 이런 것이다.

물론 용돈에 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소비 그리고 복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형이 동생의 밥을 뺏어 먹어서 동생이 배를 곯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보고 가만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부모는 당장 그 동생에게 밥을 주는 반면, 형은 뺏어 먹은 만큼 밥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배고파하는 동생에게 형이 자기의 빵을 주고 자신은 쫄쫄 굶었다고 하자. 이것을 보고 가만있을 부모가 또 어디 있겠는가. 부모는 당장 그 형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예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부모가 가족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면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자신들도 다른 가족들에게 이타적으로(혹은 이타적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면 상식적인 얘기다. 경제학자들이 늘 그렇듯이 베커 교수 역시 이런 상식적인 얘기를 복잡한 수학을 이용해서 하나의 정리(定理)로 정리하였다. 이 정리가 바로 유명한 '불량아 정리(Rotten Kid Theorem)'다. 이 정리에서 베커 교수가 보인 것은,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굳이 이런 경제학의 논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타심이라고 하면 가정을 연상할 정도로 건전한 가정은 이타심이 주도하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집단이다. 그래서 많은 연구들이 사회적 자본의 산실(産室)로 가정을 최우선적으로 꼽는다. 그렇다면, 만일 부모가 이타적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불량아 '와 나란히 베커 교수가 증명한 '시기심에 대한 정'가 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만일 부모가 가족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해주지 않는다면(다시 말해서 이타심의 중심축이 없다면), 가족들 사이의 시기심이나 이기심은 가족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정은 이타심이 함양되고 퍼져나가는 사회의 중심단위가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량아 정리와 시기심의 정리는 가정에만 적용되는 이론은 아니다. 다른 집단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헌신적인 사장과 소수의 이타적인 간부가 이끄는 회사는 높은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베커 교수는 "경제생활에서 이타심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막중하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타심에 대한 베커 교수의 이론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시사점을 던진다. 그 첫 번째 시사점은, 건전한 가정은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는 원천으로서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건전한 가정은 경제를 튼튼하게 해주며 우리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어주는 사회기반시설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개인에게도 이익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이익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전한 가정의 유지는 개인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일이요 따라서 가족 구성원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성장동력으로 녹색성장만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건전한 가정의 육성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두 번째 시사점은 사회지도 계층이 믿을 수 있게 행동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경쟁력 있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의외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기적이므로 이를 현실로 인정하고 이 이기심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늘 주장한다. 이들 대부분은 이타심의 함양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이타심의 함양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베커의 이론은, 마치 가정에서 부모의 이타심이 중심축이 되듯이 사회에서는 사회지도계층이 이타심 확산의 중심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이타적일 필요는 없다. 오직 사회지도계층이 믿을 수 있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를 밝고 튼튼하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프레시안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0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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