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하였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혈서를 쓰고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사실로 증명된 것이라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내용의 혈서를 썼음을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자료로 친일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사료로 평가된다. 한편 2009년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8년간의 친일청산의 대작업인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에 대하여 박정희 유족을 대표한 아들 빅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 발간 금지가처분을 내는 등 반발하고 있다.
"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최상천 전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는 ‘알몸 박정희(인물과 사상사)'라는 책을 통해서 박정희란 인물에 대하여 연구하였고 최교수가 정리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생은 파란만장하다.
‘시골의 평범한 학생→두목 급장→보통학교 교사→‘충성 혈서’→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제국주의자→만주 군관학교→일본 육사→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만주 주둔 일본군 장교→다시 박정희→가짜광복군중대장→대한민국 육군장교→공산주의자→남로당군 최고책임자→진압군작전장교→무기징역죄수→반공주의자→육군정보장교→반란군두목→민정이양공약→출마선언→대통령→“개헌은 없다”→3선 개헌→“이번이 마지막 출마”→종신 대통령→부하의 총에 사망’
다음은 <만주신문>의 기사 내용 전문을 해석한 내용이다.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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